
SaaS에 투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물렸다.
분기마다 실적 발표를 보면서 "이번엔 반등하겠지"를 되뇌는 평범한 직장인 투자자다. 그런데 작년부터 타임라인을 점령한 말이 있다.
"AI가 SaaS를 죽인다."
심지어 이름도 그럴듯하다.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 듣는 순간 내 계좌부터 종말을 맞는 느낌이다.
점심시간에 ChatGPT를 켜고, 회사에선 여전히 Jira·Notion·Slack·CRM을 쓰면서도, 머릿속엔 이런 질문이 맴돈다.
"잠깐만… 다들 AI 하나로 일한다며? 그럼 내가 쓰는 이 수많은 SaaS는 뭐가 되는 거지?"
그리고 더 현실적인 질문 하나.
"내가 투자한 그 SaaS 기업은 진짜 끝나는 걸까?"
이 글은 AI 낙관론도, SaaS 옹호문도 아니다. AI를 만져보며 일하는 현직 직장인, 그리고 SaaS에 돈을 넣어본 개인 투자자의 시선으로, 'AI가 SaaS를 죽인다'는 말이 왜 절반만 맞는지, 그리고 실제로 죽어가는 건 무엇이고 살아남는 건 무엇인지의 구조를 한번 따져보려 한다.
계좌는 감정적일지 몰라도, 분석만큼은 차분하게. 사스포칼립스라는 무서운 단어 뒤에 가려진 진짜 이야기를, 이제 하나씩 열어보자.
주가는 반토막인데 매출은 왜 오르나 — SaaS 붕괴 공포의 실체
2025년 하반기부터 SaaS 주식들이 집단으로 무너졌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수조 원이 증발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AI가 소프트웨어 산업 자체를 대체한다"는 공포가 시장을 덮었다.
근데 실적은 달랐다.
ServiceNow는 구독 매출이 20% 이상 성장했고, Datadog은 계약 북킹이 37% 급증했다. 주가는 반토막인데 매출은 올랐다. 이 괴리가 말해주는 게 있다 — 시장이 공포를 너무 앞서 반영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안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공포가 과잉이어도, 공포가 향하는 방향 자체는 맞을 수 있다. 구조적으로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는 진짜다. 다만 "SaaS 전체가 죽는다"는 건 틀린 진단이고, 정확한 진단은 따로 있다.
어떤 SaaS가 먼저 죽는가 — per-seat 모델과 기능 판매의 종말

AI 에이전트가 확산되면 기업 안에서 "소프트웨어를 직접 조작하는 사람 수"가 줄어든다. AI 강화 직원 한 명이 다섯 명 분량의 작업을 처리하면 — 라이선스 다섯 개가 필요 없어진다. 이게 per-seat 수익 모델의 정면 충격이다.
Q4 2025 실적 발표 시즌에 복수의 SaaS 기업 CFO들이 같은 말을 했다. 고객들이 계약 갱신 협상에서 좌석 수를 줄이겠다고 나온다는 것.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특히 빨리 대체되는 건 반복·규칙 기반 작업이다. 고객 지원 1차 응대, 인보이스 처리, 근태 승인 같은 것들. 이 기능들에 집중한 SaaS는 AI가 직접 대체하거나, 저렴한 AI 래퍼 스타트업이 훨씬 낮은 가격에 치고 들어온다.
기능이 상품화(commoditize)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우리 툴은 이 기능이 있다"는 게 경쟁력이었는데, 이제 그 기능을 AI가 만들어주거나 복제할 수 있다면 — 경쟁 우위 자체가 사라진다.
현장에서 보면 이게 체감된다. 팀에서 쓰던 특정 마케팅 자동화 툴이 "이거 ChatGPT로 대충 되는 거 아니야?"라는 말에 재검토 대상이 됐다. 3년 전이었으면 그런 말 자체가 안 나왔다.
살아남는 SaaS는 무엇이 다른가 — 데이터 해자와 워크플로우 잠금

그러면 다 죽느냐? 아니다. 살아남는 쪽은 구조가 다르다.
의료 기록 시스템, 금융 결산 소프트웨어, 공급망 관리 플랫폼 — 이런 것들은 AI가 올라타야 하는 기반이 된다. AI 에이전트가 아무리 똑똑해도 어딘가에 연결돼야 실행된다. 그 연결 지점이 데이터와 규정·워크플로우가 쌓인 SaaS 플랫폼이다.
Gartner가 2030년까지 point-product SaaS 35%가 AI 에이전트로 대체될 것이라고 했는데, 뒤집어 읽으면 65%는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그 65% 안에 있는 게 뭔지가 중요하다.
살아남는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결정론성 요구가 높은 영역. LLM은 열 번 중 여섯 번 정확하다. 의료 진단, 금융 언더라이팅, 규제 보고는 100% 일관성이 필요하다. 현재 기술로는 AI가 이 영역의 핵심 시스템을 대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현장 CIO들이 말한다.
둘째, 데이터 해자(moat)가 깊은 곳. 고객 데이터가 플랫폼에 쌓일수록 AI도 그 위에서 돌아야 하는 구조가 된다. 기능만 파는 게 아니라 데이터 자체가 자산인 SaaS는 다른 얘기다.
셋째, 수익 모델을 전환하는 속도. per-seat에서 usage-based(사용량 기반) 또는 outcome-based(성과 기반)로 빠르게 바꾸는 기업은 좌석 수가 줄어도 유저당 매출(ARPU)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전환을 못 하면 같은 제품이어도 매출이 구조적으로 쪼그라든다.
버티컬 SaaS는 피해자인가 수혜자인가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헬스케어 SaaS, 제조업 SaaS 같은 특화 버티컬 시장은 오히려 성장 중이다. Forrester 데이터 기준으로 $133B에서 $194B 규모로 확장 전망이 나온다. 반면 일부 VC 분석에서는 AI 네이티브 버티컬 스타트업이 400%씩 성장하며 기존 버티컬 SaaS를 위협한다는 말도 나온다.
둘 다 맞다. 단지 세분화의 문제다.
특정 산업의 규정·데이터·워크플로우를 오래 다뤄온 버티컬 SaaS는 AI가 복제하기 어렵다. 근데 버티컬 안에서도 기능만 파는 단순한 것들은 AI 스타트업에 먹힌다.
결국 같은 논리가 반복된다. 기능인가, 데이터와 워크플로우인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걸 읽는 사람이 어떤 포지션인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SaaS 회사에 다니거나 이 업계에 있다면:
지금 내가 속한 제품이 "기능을 파는가, 데이터를 파는가"를 먼저 봐야 한다. 기능 중심이라면 AI가 복제하거나 대체하는 속도가 빠를 것이고, 회사가 수익 모델을 바꾸지 않는다면 3~5년 안에 구조적 압박이 온다. 반대로 고객 데이터가 깊게 쌓이고 규정이 복잡한 영역에 있다면, AI가 파트너가 되는 쪽에 가깝다.
이직이나 커리어를 고민한다면 — AI가 대체하는 워크플로우 위에 있는 역할인지, AI가 연결되어야 하는 인프라 위에 있는 역할인지를 구분하는 눈이 필요하다.
SaaS 주식이나 IT 관련 자산을 갖고 있다면:
지금 시장은 AI 공포가 극에 달해서 강한 SaaS와 취약한 SaaS를 구분하지 않고 같이 내리고 있다. 이 구분이 주가에 반영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옥석 가리기 구간이 된다.
스크리닝 기준은 단순하게 세 가지다.
하나, per-seat에서 usage/outcome 기반으로 수익 모델 전환을 시작했는가.
둘, 고객 데이터가 플랫폼에 축적되는 구조인가, 아니면 기능만 파는 구조인가.
셋, 실제 분기 매출은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 — 주가 하락이 실적 하락을 반영하는지 아닌지를 분기 보고서로 확인해야 한다.
"SaaS 전체를 피해라"도 아니고 "SaaS는 괜찮다"도 아니다. 어떤 SaaS냐가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