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지만, 우리에게는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매년 이날만큼은 어딘가 제대로 된 곳을 찾게 된다.
올해는 **쉐시몽(Chez Simon)**으로 향했다.
2025 미쉐린 가이드에 오른 이곳, 예약은 진작부터 잡아뒀었다.
공간 — 햇빛과 유리, 그리고 N서울타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천장이다.
철제 프레임 위로 유리가 쭉 이어지는 아트리움 구조. 낮 시간대에는 자연광이 그대로 쏟아져 내려온다. 나무 바닥, 라탄 의자, 화분들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풍경이 파리 어딘가의 비스트로를 연상시킨다.

창가 자리가 배정됐다.
통유리 너머로 이태원 거리가 훤히 보이고, 멀리 남산 위 N서울타워가 또렷하게 들어온다.
도심의 파인다이닝인데 답답하지 않다. 맑은 날이라 더 좋았다.
오늘의 메뉴 — 데죄네 코스

이날의 코스는 Déjeuner(데죄네), 런치 코스다.
메뉴 카드에 나란히 적힌 구성:
- Amuse Bouche 1 — 허브, 참치
- Amuse Bouche 2 — 문어, 오징어
- Amuse Bouche 3 — 화이트아스파라거스, 홍새우
- Entrée — 오늘의 랭신
- Plat Principal — 육우안심스테이크
- Dessert — 돌체 아이스크림
이 순서대로 나왔다.
Amuse Bouche 1 — 허브, 참치

트라버틴 질감의 둥근 돌판 위에 두 가지가 올라왔다.
하나는 얇은 튀일처럼 바삭하게 만든 참치 롤, 다른 하나는 황금빛 쿠페 안에 마이크로그린을 가득 얹은 허브 컵.
롤은 겉이 바삭하고 속에 참치의 감칠맛이 응축돼 있다. 허브 컵은 씹으면 신선한 풀 향이 터지는 구성. 코스 시작을 알리는 작은 한 입인데, 공을 들인 티가 난다.
Amuse Bouche 2 — 문어, 오징어

꽃잎처럼 물결 잡힌 흰 접시 위에 스푼 하나.
거기에 오징어와 문어를 이용한 작은 한 점이 올려 있다.
겉은 살짝 그을려 불 향이 배어 있고, 안은 부드럽다. 스푼째 통으로 먹어야 하는 구성이라, 한 번에 맛이 다 들어온다. 그 순간이 짧지만 정교했다.
Amuse Bouche 3 — 화이트아스파라거스, 홍새우

세 번째 아뮤즈부쉬가 이날 코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다.
짙은 청록색 볼에 담긴 크림처럼 부드러운 화이트아스파라거스 수프.
그 위에 선홍빛 홍새우, 초록의 파바빈, 부드럽게 익힌 흰 야채가 올라가 있다.
국물 자체가 가볍지 않다. 아스파라거스 특유의 은은한 쓴맛과 단맛이 크리미한 베이스에 녹아 있고, 새우의 단맛이 한 층 더 얹힌다. 한 입 떠 넣으면 봄 채소 향이 퍼진다.
빵

코스 중간에 식사 빵이 나왔다. 도톰하고 촉촉한 빵과 플뢰르 드 셀이 뿌려진 버터. 단독으로 먹어도 괜찮고, 수프에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Entrée — 오늘의 랭신

앙트레는 **랭신(lingcod)**이었다.
흰 살 생선을 껍질 쪽부터 바삭하게 구워낸 한 점.
접시 위로 허브 오일이 초록빛 물결처럼 퍼져 있고, 딜이 두서없이 흩뿌려져 있다. 옆에는 토마토 콩피가 놓였다.
생선 자체가 두툼하지 않은데 안은 촉촉하다. 딜 오일의 풀 향이 생선의 담백함을 잡아주고, 토마토 콩피의 산미가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준다. 프렌치식 생선 요리의 교과서 같은 구성이었다.
와인 — Domaine Tourbillon "Plan de Dieu"

점심인데도 와인을 골랐다.
서버가 들고 온 건 Domaine Tourbillon - Plan de Dieu, Côtes du Rhône Villages의 레드.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뜻의 산지 이름처럼 로맨틱한 이름이다.
진하지 않고 과일 향이 앞서는 론 스타일. 스테이크와 잘 맞았다.
Plat Principal — 육우안심스테이크

메인 디시가 나왔을 때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육우 안심 두 점이 미디엄 레어로 잘 익어 있고, 그 옆에 **마이타케(춤추는 버섯)**가 볶음 상태로 함께 놓였다.
감자 퓨레와 머스터드 씨앗이 곁들여져 있다.
고기는 기대한 대로였다. 결이 촘촘하고, 중심부까지 분홍빛이 살아 있다. 씹을수록 육즙이 나오고, 마이타케의 나무 향이 고기 향과 섞이면서 한층 깊어진다. 퓨레는 느끼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이 한 접시를 위해 온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Dessert — 돌체 아이스크림

디저트는 돌체 아이스크림.
볼록하게 파인 그릇 안에 아이스크림 한 스쿱, 레드 베리류, 아몬드 슬라이스, 그리고 투명한 젤리 조각이 올라가 있다.
차갑고 달콤한데 무겁지 않다. 코스 끝을 부담 없이 맺는다.
피날레 — 휘낭시에와 Anniversary 레터링, 그리고 녹차

디저트가 끝나고 마지막에 나온 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흰 접시 위에 휘낭시에 두 조각, 그리고 초콜릿으로 쓴 레터링:
"Happy Anniversary 💕 Cheers to us 💕"
예약 시 결혼기념일임을 기재해뒀는데 이렇게 응답해줄 줄은 몰랐다.
초 두 개가 꽂혀 불이 켜진 채로 나왔다. 소소하지만 꽤나 마음을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그 뒤에 녹차가 나왔다. 유리 포트에 담긴 맑고 노란빛의 차 한 잔.
식후 정리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준다.
총평
쉐시몽은 미쉐린 레스토랑이 흔히 풍기는 긴장감이 없는 곳이었다.
공간은 밝고 트여 있고, 서비스는 격식 없이 편안했다. 요리는 각 단계마다 제 역할이 분명했고,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특히 화이트아스파라거스·홍새우 수프와 육우안심스테이크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 휘낭시에와 레터링은 결혼기념일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 작은 배려였다.
어린이날에 아이 없는 부부가 파인다이닝을 간다는 게 조금 웃겼지만, 그래서 더 우리만의 날 같았다.
쉐시몽 (Chez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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